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델마 스쿤메이커 (문단 편집) == 생애 == 델마 스쿤메이커는 [[알제리]]의 [[알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정치인 가문의 후손이었으며, 석유 회사인 스탠다드 오일에서 근무했다. 1955년 15살이 되어서야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해외에서 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외교관]]을 목표로 했다. 그래서 [[코넬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당시,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 [[미국 국무부]] 시험을 보기도 했으며, 실제로 시험을 통과하기도 했으나 최종 시험에서 불합격했다.[* 스쿤메이커는 최종 시험 당시, [[아파르트헤이트]]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책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했는데, 감정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합격하게 됐다.] 스쿤메이커가 편집자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은 [[컬럼비아 대학교]] 미술 대학원 [[원시주의]] 교육 과정 중이었다. 대학원에서 미술에 대해서 배우는 동안, 스쿤메이커는 [[뉴욕 타임스]]에서 편집 보조직을 구하는 광고를 보게 된다. 곧바로 신문사에 편집직에 지원했고 일자리를 얻게 된다. 이곳에서 편집이라는 직업이 흥미롭다는 것을 알게 됐고, [[뉴욕 대학교]]의 영화 편집 과정에 등록했다. 당시에는 영화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지 못했는데, 골수 [[시네필]]이 아니어서 텔레비전에서 옛날 영화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쿤메이커가 영화 학교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을 꽤 빨리 발견했다고 한다. 스쿤메이커는 뉴욕대에서 전문적인 편집 기법을 배웠다. 대표적으로 자막 제작을 도왔고 커팅 기술을 배웠다. 그 후 뉴욕대에서 6주간 영화 제작 과정을 수강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학생 [[마틴 스코세이지]]를 만나게 된다. 스쿤메이커는 후일 인터뷰에서 뉴욕 대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말했는데[[https://www.villagevoice.com/2018/10/02/his-girl-friday-thelma-schoonmaker-cuts-things-down-to-size/|#]], 스코세이지가 자신에게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https://www.ft.com/content/b718ca00-d4b5-11e3-bf4e-00144feabdc0#axzz31OYhFdMg|#]] 스코세이지가 선생이었고 자신이 학생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것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 말은, 만약 제가 그(스코세이지)를 거기서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영화 제작을 계속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티를 만났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건 그냥 운명이었어요. >---- >델마 스쿤메이커 [[https://web.archive.org/web/20131213150924/http://www.greencine.com/article?action=view&articleID=340|#]] 당시 스코세이지는 6명으로 구성된 팀을 나눠서 10분짜리 단편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팀의 누군가가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잘못 편집했다. 당시 스쿤메이커는 이 부분을 팀의 일원이 잘못 편집했다고 빠르게 지적했고, 그 과정에서 교수는 스쿤메이커에게 스코세이지의 영화를 편집하는 것을 도와주라고 요청했다. 영화의 편집작업을 시작하면서 스쿤메이커와 스코세이지는 빠르게 친해졌고, 지금까지 이들은 절친으로 유명하다. 또한 스코세이지는 스쿤메이커의 편집 능력을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1967년 개봉한 자신의 데뷔작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의 편집 감독으로 기용했다. 참고로 편집자로서 스쿤메이커의 첫 번째 일은 미국 TV의 시간 간격에 맞추기 위해 고전 유럽 영화를 잘라내는 것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choomaker_scorsese_cropped.jpg|width=100%]]}}} || || {{{#fff '''델마 스쿤메이커와 마틴 스코세이지'''}}} || 데뷔 이후 4년 뒤인, 1971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우드스톡'으로 커리어 최초로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에 오른다. 다만, 커리어 초창기에는 편집자 활동의 어려움을 겪었는데, 영화 편집자 협회의 회원이 될 수 없어서 장편 영화 편집 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편집자 협회 가입 조건이 견습생으로 5년을 보내는 것과 어시스턴트로 3년을 보내는 것인데 스쿤메이커는 이걸 싫어했다고 한다. 스쿤메이커는 인터뷰에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던 제가 왜 갑자기 어시스턴트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https://www.villagevoice.com/2018/10/02/his-girl-friday-thelma-schoonmaker-cuts-things-down-to-size/|#]]] 그래서 [[1970년대]] 마틴 스코세이지 작품의 편집 감독으로 활동하지 못했다.[* 1970년대에는 마샤 루카스와 톰 롤프가 스코세이지의 전담 편집자였다.] 다만, 크레딧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택시 드라이버]]'의 보조 편집자로 들어와 편집 작업을 도와줬다. 스쿤메이커는 1980년이 돼서야 친구 스코세이지의 도움으로 영화 편집자 협회 회원이 된다.[* 하지만 스쿤메이커는 [[알 파치노]]가 자신을 협회에 가입시켰다고 믿고 있다. 다만, 이쪽도 확실하지 않아서 누구의 도움으로 회원이 됐는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스코세이지는 스쿤메이커가 회원이 되자마자, 자신의 영화 '[[분노의 주먹]]'의 편집 감독으로 기용했다. '분노의 주먹'은 역대 최고의 편집 영화로 꼽힐 정도로, 편집 예술의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스쿤메이커는 이러한 뛰어난 성과를 인정받아 많은 시상식에서 상을 수상했다. 스코세이지의 연출작 중에서 처음으로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에 올랐으며, 자신의 첫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게 된다. '분노의 주먹' 이후 스코세이지의 많은 영화를 편집하면서 명편집자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67년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부터 2023년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까지 스코세이지의 전담 편집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무려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스코세이지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편집했다. 그만큼 스코세이지가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인물이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알겠지만, 극소수의 영화를 제외하면 전부 스코세이지 작품이다. 스쿤메이커는 아카데미 편집상을 총 3번 수상해 최다 수상자 기록을 갖고 있으며, 8번 후보에 올라 최다 후보자 기록도 갖고 있다.[* 이 기록도 스필버그 영화를 전담하고 있는 편집자 마이클 칸과 타이 기록이다.] 현대 미국 영화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중요한 편집자 중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2년 콜라이더가 선정한 영화사의 위대한 편집자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https://collider.com/best-film-editors-of-all-time/#sergei-eisenstein|#]] 201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편집자로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명예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명예 황금사자상을 받은 최초의 편집자이다. 2019년에는 [[영국 아카데미]]에서 평생 공로상(BAFTA Fellowship)을 수상했다.[* 수상 당시, [[케이트 블란쳇]]이 헌정하는 연사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